4·19혁명의 배경
4·19혁명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장기집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와 불만이 폭발한 결과물입니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이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불법 개헌과 부정선거를 반발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인, 경찰, 공무원 등의 부정부패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쌓이며, 그의 장기집권은 국민의 불신을 사기케 했습니다. 이로 인해 4·19혁명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와 민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3·15 부정선거
: 1960년 2월에는 대구와 대전에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여 시민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야당 참관인을 축출하고,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득표수를 조작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습니다. 또한, 3인조 등의 조별로 투표를 하는 반공개 투표 등의 비도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부정한 선거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런 행태는 국민들의 정당한 불만과 요구를 무시하고 불법적인 정권 연장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3·15 마산 의거
이에 같은 날 마산에서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을 통해 강제 진압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규탄 시위에는 마산 상업고등학교 학생들과 김주열 군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주열 군은 시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 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로 세상에 알려지며,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4·19혁명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실의 비인도적인 사건이 현지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와 규탄을 불러일으키며 혁명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총 궐기
시민들은 물론 중·고등학생과 초등학생들까지도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정권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경찰, 군인, 정치 깡패 등을 동원한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의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4월 25일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에 동참하여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들 교수단의 참여는 학문의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학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로써 더욱 광범위한 사회적 저항의 파동이 확산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결과
군중들은 이승만 정권의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완강하게 투쟁하였고4·19부터 격렬한 대 항쟁 속에서 1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며 4월 혁명이 성공을 맺었습니다.이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 혁명이 성공했던 순간입니다
국립 4·19 민주 묘지
: 4·19혁명 유공자 분들을 모신 국립 묘지는 귀중한 장소로, 김주열 군의 가묘 역시 안치되어 있습니다. 4·19 기념관과 기념탑, 묘지를 방문하여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고려하며 추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고,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곳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다짐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주세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 혁명이 성공한 순간
: 4·19 혁명은 굉장히 중요한 순간으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 혁명이 성공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는 이들의 희생 덕분에 있습니다. 그들께 감사를 표하며,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들의 투쟁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남기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지금보다 더 발전된 민주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